봉화정씨 부정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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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정씨 부정공파

정도전과 봉화정씨 홈 > 문중역사 > 정도전과 봉화정씨

정도전(鄭道傳,1342~1398)의 호는 삼봉(三峰)이며, 본관은 봉화(奉化)다.
그는 경북 영주에서 밀직제학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鄭云慶)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도전은 부친의 친구이자 대유학자인 목은(牧隱) 이색의 밑에서 수학했다.
정몽주, 윤소종, 박의중, 이숭인 등이 당시 그와 함께 공부했던 동문들이다. 

 

정도전은 스무 살이 되던 해인 1362년, 진사시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1375년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친원파의 미움을 사 회진현으로 유배된다.
그는 이때부터 10여 년 이상 불우한 시절을 보내야 했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도 삼각산 아래 초막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며 독서로 세월을 보냈다.
이 시절에 그는 고생이 너무 심해 자신의 호를 삼각산의 모양을 본떠 삼봉(三峰)으로 바꾸기까지 했다.

절치부심하던 정도전은 정치를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을 강력히 지원해 줄 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새로 떠오르는 이성계의 밑으로 들어가서 재기를 모색하게 된다. 

1384년에 정몽주가 명나라에 사절로 가게 되면서 자신과 함께 갈 사람으로 정도전을 추천했다.
외교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돌아온 정도전은 스스로 외직을 청하여 남양 부사로 있다.
이때 그는 백성들의 생활을 직접 경험하고 선정을 베풀기도 한다.

1388년 이성계의 추천을 받아 성균관 대사성으로
중앙 관계에 복귀한 정도전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맡게 된다.
5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정도전은 우선 새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제일 먼저 군사력을 확충하기 위해 중국 역대의 병법을 들여온다.
사은사(謝恩使)로 직접 명나라에 다녀왔을 뿐만 아니라
여진족과의 관계를 의심하는 명나라 조정에 해명하는 표문(表文)을 작성하기도 했다.

문덕곡(文德曲), 수보록(受寶麓), 몽금척(夢金尺) 등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 일의
어려움을 일깨우는 악곡을 지어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교훈으로 삼게 했다.
또한 국가의 제도와 운영의 근본이 되는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도 지었다.
무학대사와 함께 새 도읍지를 한양으로 정하고 실제로 궁궐을 설계했다.

그러나 정도전의 독주가 이어지면서 결국 제1차 왕자의 변란을 불러온다.
태조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은 군왕의 병이 위급함을 기회로 삼아
왕자들을 궐 안으로 불러들여 그들을 죽이기로 도모했다.
군왕의 안위가 걱정이 된 왕자와 근친들은 근정전 밖의 한 별채에 모였다.
그러나 정도전 일파의 계략을 이미 알아차린 이방원은 부인 민씨가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잠시 사저로 나갔다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후 다시 궐 안으로 들어왔다.

이방원은 급히 궁을 빠져 나와 미리 연락이 되었던 이숙번과
조영무, 처남인 민무질, 민무구 형제 등과 합류했다.
그들은 일단 이숙번의 제의로 정도전 일행이 모여 있는 남은의 소실 집으로 몰려갔다.
그곳에서 이웃집 세 채에 불을 지르고 매복해 있다가
정도전 일행이 놀라서 뛰쳐나오자 바로 척살해 버렸다.
심효생, 정지화 등은 현장에서 칼에 맞아 죽었고 정도전은 이웃집에 숨어 있다가 목이 잘려 죽었다.
남은은 간신히 도망쳤으나 나중에 잡혀서 주살되었다.
그 날 이방원은 자신의 적이 될 만한 인물들을 모두 제거하였고,
자신의 이복동생인 방번과 방석 형제까지 참살하였다.

정도전이 이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제거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실제적인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정도전이 그렇게 허망하게 이방원에게 당한 것은 의문으로 남는다.
더구나 그는 당시 요동 정벌을 위해 군사훈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자기 과신이 결국 화를 불러온 것으로 보인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면서 이성계에게 지나치게 의존했던 것이 결국 정도전에게는 비극의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자신의 뜻을 펼치기도 전에 살해되는 불행한 인물이 되고 만다. 

봉화정씨(奉化鄭氏)의 시조 정공미(鄭公美)는 고려조 호장을 지냈다.
그의 5세손 정도전이 봉화현 충의군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봉화를 본관으로 삼았다.

봉화정씨를 대표하는 최고의 인물은 삼봉 정도전이다.
조선 건국 초기에 정치. 학문. 법제방면에 탁월한 지식인이자 정치가였다.
그의 아버지는 고려 말 공민왕 때에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이다.
정도전은 동북면 병마사 이성계의 막하에서 활약했으며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성계를 도와 개국의 터를 잡았으며 조선건국 후에는 개국공신으로 찬성사가 된다.
그는 또 유학의 대가로 군사, 외교, 성리학, 역사, 행정, 저술 등 많은 부문에서 큰 업적을 남겼다. 

희절공 정진은 삼봉 정도전의 아들로 조선 개국공신에 오른 인물이다.
정도복은 삼봉의 아우로 태조 3년 성균관대사성이 된 후 낙향했다.
8세손 정문형은 우의정을 지낸 봉화정씨 인물이다.
세조 때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청백리에 올랐다.
정응철은 고종 4년에 장원급제하여 후에 비서승에 오른다.

경기도 평택군 진위면 은산리 산대마을은 봉화정씨의 5백년 텃밭이다.
정도전의 장손 정래 가 용인 현령으로 있다가 이곳에 정착한 것이다. 

 2000년에 23,173명이 있다.
주요파는 ▲희절공파 ▲양경공파 ▲부정공파 ▲소윤공파 ▲지후공파 ▲대호군파 ▲주부공파 ▲참봉공파 등이다.

< 정복규 논설위원, 한국의 성씨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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