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정씨 부정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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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정씨 부정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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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정씨 (奉化 鄭氏)

시조(始祖) : 정공미(鄭公美)

시조 정공미(公美)는 고려(高麗)에서 호부령을 지냈고, 983년(성종 2)
전국에12목을 두게 되면서 호장(戶長)이 되었다. 그의 아들 영찬(英粲)은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으며, 영찬의 손자 염의공(廉義公) 정운경(鄭云敬)은
공민왕(恭愍王) 때 형부상서를 지냈다.그리고 운경의 큰아들 정도전(鄭道傳)이
고려 공양왕 때 좌명공신이 되어 봉화현 충의군에 봉해지고
조선 개국에 공이 있어 봉화백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봉화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대표적 인물(代表的人物)
정운경(云敬) : 형부상서를 지냈다.
정도전(道傳) : 조선 태조 때 개국공신으로 영의정
정문형(文炯) : 연산군 때 우의정
봉화정씨는 조선조에서 상신 2명, 청백리1명,
공신1명, 문과 급제자 8명을 배출했다


집성촌(集姓村)
강원도 양구군 남면 야촌리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구운리
강원도 양구군 동면 임당리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
경북 영주시 이산면 원리


정도전(鄭道傳)
1342(충혜왕 3)~1398(태조 7). 고려말 조선초의 정치가·학자.
조선 개국의 핵심 주역으로서 고려 말기의 사회모순을 해결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새로운 왕조를 개창했다.
각종 제도의 개혁과 정비를 통해 조선왕조 500년의 기틀을 다져놓았다.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
고려말의 활동 향리집안 출신으로 고조할아버지는 봉화호장 공미(公美)이고,
아버지는 중앙에서 벼슬하여 형부상서를 지낸 운경(云敬)이다.

어머니는 우연(禹延)의 딸이며
어려서 경상북도 영주에서 살다가, 아버지를 따라 개경에 와서
아버지의 친구인 이곡(李穀)의 아들 색(穡)의 문하에서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이존오(李存吾)·김구용(金九容)·
김제안(金齊顔)·박의중(朴宜中)·윤소종(尹紹宗) 등과 함께 유학을 배웠다.

1360년(공민왕 9) 성균시(成均試), 1362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충주사록·전교주부·통례문지후 등을 지냈다.
1366년 아버지와 어머니가 연이어 죽자, 영주에 내려가 3년간 여묘(廬墓)하면서
지방 자제들과 동생들을 가르쳤다.

1370년 성균관이 중영(重營)되고 이색이 대사성이 되자, 성균관박사가 되었다.
이듬해 태상박사가 되고, 이어 예의정랑이 되었다.
1374년 공민왕이 암살당하자 이 사실을 명나라에 고할 것을 주장하여
이인임(李仁任)의 미움을 받았다. 1375년(우왕 1) 성균사예·지제교가 되었으나,
이인임·경복흥(慶復興) 등이 친원정책(親元政策)으로 돌아가려 하고
원나라 사신이 명나라를 치기 위한 합동작전을 위해 오자,
이를 반대하고 관련되는 업무를 거부하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귀양갔다.

1377년 고향으로 옮겨져 4년간 머물다가 유배가 완화되자 삼각산(三角山) 밑에
초려(草廬:三峰齋)를 지어 제자들에게 유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곳 출신 재상(宰相)이 삼봉재를 헐어버려 제자들을 이끌고
부평부 남촌(南村)에 거주했으나 이곳에서도 재상 왕모(王某)가
별업(別業)을 만들기 위하여 헐어버려 다시 김포로 이사했다.
유배·유랑 기간에 그는 초라한 모옥(茅屋)에 살면서
향민(鄕民)과 사우(士友)에게 걸식하기도 하고 스스로 밭갈이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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